프로젝트의 개요


게라마제도에서 일어난 오키나와 전투의 역사

참고자료:『자마미촌사』자마미촌 관계연보、『오키나와・아카섬의 전투』(中村仁勇의) 에서 일부 재편집

1941년

4월 1일
자마미 진조 고등소학교가 자마미 국민학교로 바뀜
7월
기원 2600년 기념 건립 충혼비 완성
10월 6일
자마미 청년회관 낙성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로 각 마을의 생활 개선, 근검 절약, 저축 등을 추진

1942년

아카 분교가 아카 국민학교로 독립 게루마 분교가 아카 국민학교의 분교로 바뀜

1943년

청년단, 부인회를 중심으로 방공 훈련, 소방 훈련, 방공호 만들기 실시

1944년

2월 17일
남양의 트랙섬으로부터의 귀환선“아카기마루”가 공습을 당해 자마미촌 출신의 선원 상당수가 사망
8월
오키나와 방위를 위해 만 21세부터 만 45세까지의 남자에게 징용령 시행
9월 8일
자마미의 어선 (新盛丸、新興丸) 과 아카의 어선 (盛興丸) 및 선원이 일본군에 징용되어 본섬으로 이동
9월 10일
해상 정진 기지 제1대대 (오자와 대장/약 1,000명) 와 해상 정진 제 1전대 (우메자와 대장/약120명) 가 자마미에 주둔
해상 정진 기지 제2대대 (고가 대장/약900명) 가 아카에 주둔
학교 건물이 일본 병사의 본부 숙사로 사용되어 학생들은 임시 교실 및 실외에서 수업
일본군에게 자마미 진료소 및 자마미 양잠실이 몰수됨
9월20일
민가에 장병 숙사를 할당함 장병은 진지내 방공호 구축, 주민은 식량 생산에 종사
9월 26일
해상 정진 제2전대 (노다 대장/104명) 아카에 주둔
10월 3일
미군, 오키나와 공략 (아이스버그 작전/1945년 1월 6일 작성) 을 결정
10월 10일
10.10 공습
자마미 앞바다에서 어선 (英泉丸) 이, 가미야마섬 부근에서 징용된 어선 (盛興丸) 이 미군의 폭격을 당해 승조원 10명이 사상
게라 광업소 (야카비) 의 정광 운반선 전멸
자마미, 아카에 각 7명씩 조선인 종군 위안부가 도착
12월
아카의 만 17세부터 만 19세의 남자가 전투 교련에 투입됨

1945년

1월 3일
자마미섬의 만 16세부터 만 45세의 남성이 방위대로 재편성됨. 여성 청소년 약 20명도 군속으로 징용됨
1월 21일
오전 8시경에 미군기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냄. 자마미 아카항에 정박한 선박과 게라마 해협에 정박중인 선박들이 미군의 공습으로 십여 척이 연소,침몰
1월
자마미 국민학교의 어진 (천황의 초상화) 을 대피시킴
2월 18일
자마미, 아카의 기지 주력 대대 약 1,300명이 오키나와 본섬으로 이동
아카의 조선인 종군 위안부도 기지대와 함께 이동
2월
조선인 군부 약 650명 (자마미 300명, 아카 350명) 이 배치됨
3월
아카, 야카비의 만 17세부터 만 45세의 남성이 방위대로 소집됨
아카의 만 15세부터 만 17세까지의 소년이“소년 의용대”로 조직화
3월 23일
자마미・아카 국민학교 및 민가 대부분이 폭탄 투하로 소실됨
자마미촌의 각 섬들이 공습을 당해 산림원야가 불바다에 휩싸임
주민은 방공호 또는 산으로 피난
3월 24일
때마침 섬에 와있던 선박대장 오마치 대령이 상황을 살피러 자마미에서 아카로 이동
3월 25일
미군 함정이 게라마 해협에 집결, 각 섬으로 공습 함포 사격
3월 26일
미군 제77 보병사단이 아카, 게루마, 자마미섬에 상륙. 일본군과 육상 전투 개시
08:04 아카섬 상륙
08:25 게루마섬 상륙
09:00 자마미섬 상륙
09:21 후카지섬 상륙
13:41 야카비섬 상륙
미군 상륙으로 자마미, 게루마 주민들의“집단 자결”발생
미군은 자마미의 우카진바루 마을에 사령부를 두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선무정책을 펼침
해군 군정부 포고 제1호 (니미츠 포고) 를 공포 관공서 및 아마의 돌담에 붙혀 널리 알림
자마미 마을 중심부의 소실되지 않고 남은 가옥이 촌민 (후에는 도카시키 촌민까지) 부상자의 치료 병실로 사용됨
3월
자마미 국민학교 부지는 미군 장병 전사자의 묘지로 사용됨
미군은 아사 구청장으로 미야자토 모리나가 (宮里盛永) 를, 아마 구청장으로 지넨 시게노부 (知念繁信) 를 임명
아카섬에서는 산속으로 피난한 주민들의 식량난이 극도에 달함
5월 7일
이에촌민 450명이 게루마로 이동
5월 하순
자마미 마을의“집단 자결자”의 시신을 수습
6월 1일
미군은 자마미섬에서 실험적으로“B형 군표”를 발행
6월 하순
아카 주민 약 300명과 야카비에서 일하고 있던 도카시키촌 마에지마의 주민 약 10명이 게루마로 이동
7월
미군의 포고에 의해 게라마열도 자치제 시행 (열도 대표, 지넨 시게노부 (知念繁信))
7월 23일
게루마 분교 개교. 학생: 이에촌 56명, 아카 60명, 게루마 15명, 합 131명
7월
게라마열도 의원 선거
8월
도카시키촌이 게라마열도에 통합되어 열도 의원 2명이 보충 임명됨
8월 15일
자마미 소학교가 아마에서 개교
8월 17일
일본군의 항복 사실을 미군의 특사를 통해 아카섬의 일본군 수비대에 정식으로 전달
8월 22일
아카섬의 정면 해안에서 항복 조인식이 거행됨
8월 23일
아카섬의 일본군 무장해제
마지막까지 저항한 아카섬의 주민들이 항복하여 5개월만에 하산
9월 9일
지넨 열도 대표가 미군 대위와 함께 도나키섬에 종전을 알림
9월 하순
열도 의원에 의한 선거로 미야자토 모리나가 (宮里盛永) 가 열도 대표로 선임
아카 소학교 개교
12월 23일
자마미 주둔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으로 이동

1946년

1월 초순
관공서 옛터에서“집단 자결자”의 위령제를 거행
3월 20일
게루마로부터 이에섬 주민이 귀환